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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옛 바빌론”의 종교 의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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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7월호>
제266대 로마카톨릭 교황인 프란치스코가 지난 4월 21일 향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뇌졸중에 따른 심부전으로, 장례 미사는 같은 달 26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미사가 집례되는 동안에 여러 이교도적인 종교 의식들이 산재한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먼저 이목을 끈 것은 약 5천여 명의 사제들과 약 20만 명의 추모객들에게 거행한 “성체 성사”였다. 로마카톨릭은 “제병”이 사제의 “축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살”인 “성체”로 변화된다고 주장하는데, 주님의 실제 “살”이 그날 장례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을 다 먹일 정도로 많은가 하며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특히 그들의 입 속으로 들어가던 제병은 하나같이 그 모양이 깨지지 않은 완벽한 “원” 모양이었는데, 약 20만 5천 명이 먹어야 하는 제병의 모양이 하나라도 깨지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즉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여신 “이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는 “데메테르”로, 로마 신화에서는 “케레스”로 불리며 “곡식의 여신”으로 통한다. 이 여신이 낳은 아이는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라고 불렸는데, 앗시리아에서 흔하게 불리던 “바르”는 “아들” 외에 “곡식,” “곡물”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신비 종교의 회원이 아닌 자들의 경우에는 당장에 입으로 들어갈 음식, 즉 곡식을 풍성하게 내려주는 여신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종교의 회원으로 입교한 자들은 보다 더 고차원적인 종교 행위를 추구했다. 말하자면 자신들의 혼을 살찌울 양식으로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의 빵, 즉 먹으면 죽지 않을 생명의 빵을 갈구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 입교자들에게 케레스가 제공한 “바르,” 곧 “곡식”은 단순한 빵이 아니라 “신의 아들”로 여겨졌다. 여기에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가 “내가 낳은 열매는 태양이다.”라고 한 신탁의 내용을 더하면, “곡식”으로 상정된 “아들”은 “육화한 태양신”이 된다. 이들 이교도들은 “육화한 태양신”의 상징으로 빵을 사용했는데, 그 빵이 “태양신”임을 나타내려면 반드시 “둥근” 형태여야 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집트 전문 학자 J. 가드너 윌킨슨은 그의 책 <고대 이집트인들의 생활과 관습>에서 “이 얇고 둥근 빵이 모든 제단 위에 드려진다.”라고 했다.주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약 교회에게 행하라고 주신 두 가지 의식 중의 하나이며, 주님께서는 카톨릭과 달리 “찢어서 쪼개진” 빵을 사용하셨다(고전 11:23,24). 빵을 찢었는데 카톨릭의 제병처럼 완벽한 원형이 나올 수 있겠는가? 결국 카톨릭의 성체 성사에서 사용되는 “둥근 제병”은 주의 만찬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고대 이교도들의 태양 숭배 의식에 그 기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황의 이번 장례 미사는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인 “위령 미사”로 드려졌다. 이들이 위령 미사를 드리는 것은 “행위 구원”을 교리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교황이라 해도 그가 지금 하늘나라에 갔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성경에도 없는 “연옥”이라는 장소를 창안해 냈고, 죽어서 그곳에 갔다고 “추정”되는 프란치스코의 영혼(?)을 위해, 곧 그가 연옥에서 빨리 벗어나 하늘나라로 가게 하려고 위령 미사를 드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그 기원 또한 철저히 이교도적인 실행이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에서는 카톨릭과 같은 연옥 교리를 가르쳐서, 죽은 자들이 정화 과정을 거친다고 믿었다. 유족들은 이 과정을 단축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제들의 온갖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인도와 고대 그리스에서도 똑같은 일들이 있었는데, 이에 독일의 고고학자 “칼 오트프리트 뮐러”는 그의 책 <도리안인의 역사>에서 “아르고스(Argos) 사람들은 죽은 지 30일째 되는 날, 죽은 자의 안내자라고 하는 머큐리(Mercury)에게 희생 제사를 드렸다.”라고 했다. 수이다스(Suidas)라는 저술가는 “그리스에서 가장 거대하고 비싼 희생 제사로 텔레테(Telete)라고 불리는 신비 의식이 있었는데, 플라톤에 따르면, 이 제사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해 드려졌으며, 악한 자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책임져야 할 모든 악행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준다고 여겨졌다.”라고 했다.
로마카톨릭은 이러한 이교도들의 교리를 답습하여 “연옥 교리”를 만들었다. 그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연옥에 간 것으로 믿기 때문에, 이번 위령 미사 중에 죽은 교황을 위해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Let perpetual light shine upon him).”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 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못하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들이라.』(고후 13:5)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한 성도는 자신이 죽으면 하늘나라에 간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 수 있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이 죽어서 어디로 갈지 몰랐다. 그렇기에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가야 할 곳에 대해 정확히 말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그는 “버림받은 자”에 불과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의식은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족을 속박시키는 족쇄일 뿐, 정작 죽은 자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죽음이 무섭다면, 지옥이 두렵다면 죽은 후에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죽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믿음 안에 있다는 사실을 시험하고 스스로 입증하여 구원의 확신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 교황의 장례식에서 유독 화면에 많이 잡혔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초”이다. 미사를 집전하기 위한 행렬에도, 대낮에 거행되는 미사의 제단 위에도, 관을 운구하는 행렬 가운데도 그 어디에서나 “초들”이 눈에 띄었다. 이처럼 로마카톨릭이 집착하는 “초” 또한 이교도적 의식들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 근처에 사는 “투그스인들”에게는 그 민족의 신들이나 우상들인 “부르칸”(Burchan) 앞에 “밀랍초”를 놓는 풍습이 있었다. 인도네시아 동부 말레이 제도에 위치한 몰루카 제도의 섬들에서는 섬의 주민들이 섬기는 “니토”(Nito), 즉 마귀를 경배할 때 “밀랍초”가 사용되었다. 스리랑카에서도 그들의 토착 종교 의식에서 “밀랍초” 사용이 필수적이었는데, 사원을 세워 부처상을 놓고 그 앞에다 밀랍초에 불을 붙여 밝히고 꽃으로 장식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교도들이 사용하는 “밀랍초”에는 상형문자로서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인류 초기의 신들 중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우라노스”라는 신은 “계몽자”라고 불리는데, “님롯”이 신격화되었을 때 그는 바로 이 계몽자로서 숭배를 받았다. 님롯은 태양신으로서 물질세계를 비추는 존재일 뿐 아니라 사람의 영과 혼을 깨우쳐 주는 계몽자로 여겨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님롯을 신격화하기 위해 “미트라”라는 이름의 “사자”로 묘사했다. 단순한 사자로 묘사하지 않고 사자가 입에 “벌”을 물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냈는데, 상형문자로서의 상징적 의미가 여기에 있다. 사자의 입에 “벌”이 물려 있게 한 것은 님롯을 “말씀”으로 상징하기 위함이었다. 칼데아어로 “벌”을 뜻하는 “다바르”에 “말씀”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인데, 이 “다바르”(말씀)로부터 오는 빛을 “밀랍초의 빛”으로 표현한 것이고, 이로써 “말씀으로서의 빛”(요 1:1,4,9)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체하려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교도적 의미를 받아들인 로마카톨릭은 전통 라틴 미사의 전례서에 규정하기를, 제대 위의 놓인 초는 밀랍초이거나 순수 밀랍이 51% 이상 포함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의 종교 의식 하나 하나가 이교도적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해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로마카톨릭의 이교도적 실행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지난 4월 26일 저녁에 교황의 관이 안치된 “산타 마리아 마조래 대성당” 인근에서 실행된 “묵주 기도”이다. 묵주는 관 속에 누운 프란치스코 교황의 손에도 들려 있었다. 사실 “묵주 기도”는 로마카톨릭의 전유물이 아니다. 고대 멕시코인들 사이에서는 묵주가 신성한 도구로서 사용되었다. 힌두교에서 사용하는 묵주는 “자파말라”(Japa Mala)라고 하는데, 신의 이름을 반복하며 수행(Japa)할 때 사용된다. 이슬람교에서도 “수브하” 또는 “미스바하,” “타스비흐”라는 묵주를 사용해 알라의 이름을 기억하며 기도한다. 티베트 지역에서는 정확한 기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염주(묵주)가 사용되어 왔고, 수백만의 불교도들 또한 염주(묵주)를 사용하고 있다. 특히 불교 승려들은 로마카톨릭의 묵주 기도처럼 염주(묵주)를 세면서 염불한다. 이처럼 “묵주 기도”는 이미 많은 이교도들도 실행하고 있는 이교도들의 종교 의식이다. 이교도들이 그들의 묵주를 사용하여 반복해서 기도하고 수행하는 것처럼, 로마카톨릭의 묵주 기도 또한 묵주에 달린 알을 일일이 짚으면서 똑같은 기도를 반복한다. 묵주 알 중에서도 큰 알을 굴릴 때 반복적으로 하는 기도가 있고, 작은 알을 굴릴 때 반복적으로 하는 기도가 있는데, 이처럼 “헛된 반복”을 하는 것은 이교도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종교적 위선자들의 모습을 미리 아시고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헛된 반복을 하지 말라. 이는 그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리라 생각함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을 닮지 말라. 이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아심이라.』(마 6:7,8)라고 경고하셨다. 그럼에도 로마카톨릭은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버젓이 이교도적인 묵주 기도로 헛된 반복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앞 페이지의 사진에서, 우리는 소위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본다. 사실 이것은 죽은 님롯의 아내인 “세미라미스”가 남편 님롯이 부활했다고 여겨지던 “탐무스”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서, 이처럼 로마카톨릭은 그 뼛속까지 “옛 바빌론”의 종교이다. 그럼에도 전 세계가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 미사에서 행해진 “이교도적 의식들”을 보고서도 여전히 로마카톨릭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경건한 기독교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카톨릭은 각종 종교적 형식들로 경건한 척하나, “옛 바빌론”의 종교 의식을 그대로 간직한 이교도일 뿐이다. 성경은 이 종교적 창녀에게서 빠져나와 그녀의 죄들에 동참자가 되지 말라고 경고한다(계 18:4). 올바른 신앙은 현 기독교계에 깊숙이 침투한 옛 바빌론 종교의 마수에서 벗어날 때 시작될 수 있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