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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서공회의 “뉴에이지” 전략, <새한글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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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7월호>
지난 5월, 대한성서공회 정기이사회에서는 올해 말 발간을 앞둔 <새한글성경>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지난 2021년에 신약과 시편이 출간된 바 있는데, 이제 완역본이 나오는 것이다. 대한성서공회의 설명에 따르면 이 성경은 <새번역>의 계보를 잇는 성경으로, 원문에서 직접 번역했으되(물론 대한성서공회의 작품이니만큼 파괴적 비평장치로 난도질당한 원문을 저본으로 했다.), 어린이와 청소년 등 “다음 세대”의 독자들에게 맞추어 쉬운 언어로 옮기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디지털 세대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온라인으로도 출판하여 전자기기를 통한 접근성을 높이고, 다양한 시청각 자료도 첨부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다. 기성 교인들의 반발을 예상했는지 홈페이지에 올라온 영상에서 이두희 번역 담당 부총무는 기존 성경을 대체하고자 <새한글성경>을 출간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다만 <개역개정판>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나란히 두고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새한글성경>은 긴 문장에 쉽게 피로해하는 현대인들의 눈높이에 맞춘 문장에 16개의 단어 또는 50자를 넘지 않는다는 원칙하에 번역되었다는 점을 자랑한다. 그러나 번역된 결과물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가 드러나는데, 그 실례를 하나 보자면 이렇다(<한글킹제임스성경>과의 대조를 위해 본 글에서는 바른 성경을 먼저 인용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들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각처에서 우리 주, 즉 그들과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 편지하노니』(한글킹제임스성경, 고전 1:2). 「코린트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해진 분들이며,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인 여러분에게 말입니다. 더불어 곳곳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모든 분들에게도 보냅니다. 예수 그리스도님은 그들과 우리의 주님이십니다」(새한글성경, 고전 1:2).
성경을 읽는 맛이나 어투에 관한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필요 이상으로 이뤄진 문장의 분절로 인해 첨가된 “보냅니다,” “여러분” 등의 서술어나 주어 때문에 <새한글성경>은 도저히 성경으로 보이지 않는다. 성경은 때로 어떤 단어가 몇 번 나왔는지를 통해서도 진리를 계시한다. 가령 이사야 14:13,14에서 루시퍼는 “내가”라는 표현을 총 “5회” 사용하는데, 성경에서 “5”는 “죽음의 수”이다(삼하 2:23; 3:27; 4:6; 20:10). 요한계시록 20:2-7에서는 “천 년”이라는 표현이 “6회” 나오며, 이는 재림하신 주님께서 천년왕국을 수립하실 때까지 인류의 역사가 6,000년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런 까닭에 성경에는 한 단어라도 무분별하게 들어가면 안 된다! 성경을 번역할 때 번역자 임의로 표현을 집어넣는다면, 누가 위와 같은 성령님의 조명을 기대하면서 한 자 한 자 꼼꼼히 성경을 탐독하겠는가?
더욱 심각한 것은 문장을 제멋대로 나눔으로써 교리적인 내용이 희석된다는 데 있다. <한글킹제임스성경>에는 “하나님의 교회”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들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임이 선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교회”는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 즉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킨다(행 20:28, 고전 10:32; 15:9, 갈 1:13). 이 진리는 심지어 <개역개정판>의 고린도전서 1:2에도 드러나 있다. 하지만 <새한글성경>의 고린도전서 1:2에서는 고린도 성도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만 분명할 뿐, “하나님의 교회”가 구원받은 성도들 자체를 가리킨다는 진리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점은 한국어의 언어적 특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것이 아니라, 번역자의 자의적 판단을 따라 문장에 손을 댔기 때문에 생긴 문제다. 번역자들이 교리에 무지하면 누락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당초에 의미 단위의 문장 분절은 성경의 모든 진리를 완벽에 가깝게 알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원어란 것을 조금 알 뿐 교리적 역량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대한성서공회 번역자들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작업에 착수한 것인가? 그들의 그릇된 자신감과 관련해서 어울리는 말씀이 있다. 『교만은 멸망에 앞서 있으며 거만한 영은 몰락에 앞서 있느니라』(잠 16:18).
교리적 참사는 “문장 단위”에서뿐만 아니라 “단어 단위”에서도 발생한다. 한자어를 어려워하는 다음 세대에게 친숙하도록 어휘를 고친답시고 교리적으로 중요한 단어들을 마구 풀어 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새한글성경>은 물리적인 지상 왕국을 가리키는 『천국』(마 4:17)이라는 단어를 “하늘나라”로 옮겼다. <새번역>의 전철을 그대로 밟은 것이다. 또한 그들의 “예수님”은 “회개하십시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와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이 구절을 접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겠는가? 예수님께서 메시아 왕으로 통치하실 왕국이 임박했다는 생각이 들겠는가? 아니면 네가 곧 죽어서 하늘나라로 갈 것이라는 투로 들리겠는가? 하기야 그들의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을 보니 “왕”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새한글성경>의 “예수님”은 마리아를 『여인이여』(요 2:4)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어머니”라고 부른다. 이것은 <새번역>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모습이다.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만들고 싶어 하는 로마카톨릭의 마수가 닿은 <공동번역>쯤은 되어야 할 수 있는 짓을 “개신교 성경”이 버젓이 자행한 것이다. 심지어 <공동번역>보다 끔찍한 부분도 더러 있다. 예컨대 시편 1:2의 『법』을 “가르침”으로 번역하여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와 여타의 “가르침”을 동일선상에 놓은 것이 그렇고, 『그의 하늘나라』(딤후 4:18)를 “주님의 나라”로 번역하여 “하늘나라”가 “셋째 하늘”에 있는 실제적인 왕국임을 알 수 없게 만든 것도 그렇다. 이런 면은 여태껏 어떤 변개된 한글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독보적인” 모습이다.
요컨대 <새한글성경>은 “내용의 정확성”을 희생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번역된 성경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 가운데 가장 우선시되는 것이 “교리”이기 때문에(딤후 3:16,17), 이는 뼈를 주고 살을 취한 셈이다. “다음 세대”에게 진입 장벽을 낮춰 주겠다는 허울 좋은 핑계를 제아무리 가져다 댄다고 해도,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 많이 보급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야말로 “이익이 경건”(딤전 6:5)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이지 않은가!
언어의 역사성에 따라 폐어가 되어 버린 단어를 교체하고, 맞춤법과 표현의 변화를 수용하여 성경을 교정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영어 <킹제임스성경>도 17,18세기의 철자 개혁에 맞춰 교정된 바가 있다. 그러나 새로운 번역을 내놓는 것은 다른 문제다. 성경의 어려운 구절은 그 의미를 가르쳐 주면 될 일이다(느 8:8). 다시금 원어를 들여다보며 새로운 번역을 내놓거나 쉬운 말로 고쳐 써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디모데는 어릴 때부터 성경을 알았다(딤후 3:15). 그가 읽은 성경은 쉬운 말로 된 “어린이용” 성경이었는가? 절대 아니다. 디모데가 알았던 성경은 그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케(딤후 1:5)가 알았던 것과 똑같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이었다. 디모데는 어른들과 같이 “어려운 어휘”로 기록된 성경을 읽고 성장했다. 하지만 디모데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욥기와 모세오경이 기록된 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약 3,500년의 기간 동안 인류 역사에서 “성경이 너무 어려워서” “새로운 성경”이 필요했던 “새로운 세대”는 하나도 없었다. 성경은 오히려 그런 변명은 주님께로부터 마음이 떠난 까닭에 나오는 것이라고 지적하신다(사 29:12,13). 따라서 새로운 성경을 번역할 정당성을 확보하려거든 기존 성경이 어렵다는 이유를 가져다 댈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는 그 변개된 성경의 오류를 인정해야 한다. 대한성서공회의 태도가 돈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딤전 6:10) 장삿속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역개정판>의 오류를 인정하고서 이를 대체할 새로운 번역을 내겠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의 나라 일본의 민간 신앙인 “신토”(神道)에 따르면 신이라도 인간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신은 인간의 숭배를 통해 신위(神位)를 확보하기에, 신도가 적어지면 존속 자체가 위태롭기 때문이다. <새한글성경>을 출간하는 대한성서공회의 태도를 보면 그들의 “하나님”도 신토의 신들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들의 “하나님”은 인간들이 그의 말에 맞춰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교세의 확보를 위해 그 자신의 “말씀”을 인간들에게 맞춰 주는 신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모습은 인간의 권리가 극에 달한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 시대가 완전히 무르익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한 단면이다. 이제 곧 교회가 휴거되고 나면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다음 세대,” 즉 “뉴에이지” (New Age)가 도래할 것이다. “다음 세대”를 대상으로 삼은 <새한글성경>은 “뉴에이지”에 꼭 맞는 성경이 될 것이다. 그런 것들에 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분명하다. 『나의 백성들아, 그녀에게서 나오라. 그리하여 그녀의 죄들에 동참자가 되지 말고 그녀의 재앙들도 받지 말라』(계 18:4).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