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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가지신 젊음의 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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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2월호>
시편 110편은 「다윗의 시」가 그 표제이다. 이 시편은 “다윗”이 “다윗의 아들”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지만, 주님께서 “다윗의 아들” 그 이상이신 분임을 계시한다.본 시편은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나의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나이다.』(1절)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다윗은 두 하나님, 곧 『주』와 『주』를 언급하며 시를 시작한다. 『주』는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에 해당되시고, 『주』는 “아들 하나님”에 해당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 명령을 주시며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마 28:19) 하셨을 때, 『아버지』께서 『주』이시고 『아들』께서 바로 그 『주』이시다.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로 운을 뗀 1절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한다. 초림 때 주님께서 『너희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누구의 아들이냐?』라고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시자, 그들은 『다윗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대답했다(마 22:42). 이에 주님께서는 『그러면 어찌하여 다윗이 영 안에서 그를 주라 부르며 말하기를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나의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였겠느냐? 그러므로 만일 다윗이 그를 주라 부른다면 어떻게 그가 다윗의 아들이 되겠느냐?』(마 22:43-45)라고 물으셨다. 이는 메시아(그리스도)이신 주님을 다윗이 『주』라고 불렀다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다윗의 아들』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신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기에(롬 1:3) 『다윗의 아들』(마 1:1)이신 것이 맞지만, 주님을 그 정도로만 알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에서 나오며, 또 다윗이 살던 고을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말하지 아니하였느냐?』(요 7:42)라는 말씀처럼, 다윗의 계보를 통해(마 1장) 베들레헴에서 나신 “메시아”(미 5:2)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메시아이신 주님을 영 안에서 『주』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예로 드심으로써, 주님 자신을 다윗의 아들 그 이상이신 『주』, 곧 “하나님”으로서 계시하신 것이다. 『조상들도 그들의 조상이며 육신으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영원히 송축받으실 하나님이시라. 아멘』(롬 9:5).
의심 많은 도마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여.』(요 20:28)라고 고백한, 『참 하나님』(요일 5:20)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편 110:1에서 『주』라고 불리셨고, 마태복음 22:44에서 『주』로서 입증되셨으며,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주』이시고, 독자가 이 글을 읽고 있는 순간에도 『주』이시다. 겨울이 춥다 하여 태양이 식어 버린 것이 아니듯이, 『의의 태양』(말 4:2)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생의 겨울을 하늘의 온기로 감싸 주실 수 있는 위로의 『주』이시다. 바로 이 주님께서 당신에게 약속하신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히 13:5). 참으로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히 13:8), 당신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주』이시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나의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1절)라는 말씀은 신약에서 직간접적으로 여섯 번 인용되었다(마 22:44, 막 12:36, 눅 20:42,43, 행 2:34,35, 히 1:13; 10:12,13).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원수들을 발판으로 삼으실 일은 “재림” 때 있게 된다. 본문 말씀은 “21세기의 바벨탑”인 UN(국제연합)을 극심하게 저주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그들이 재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에 짓밟혀서 먼지를 핥을 뿐만 아니라(시 72:9, 사 49:23, cf. 수 10:24), 예루살렘의 시온 산에 계신 그 “군사 독재자”의 발에 입맞추지 않는 자들은 그분의 철장에 얻어맞아 산산조각으로 부서질(시 2:8-12, 계 2:26,27)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의로 통치하실 천년왕국에 여전히 “주님의 원수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능력의 막대기를 보내시리니 주의 원수들 가운데서 다스리소서』(2절). 주님께서 『위대한 왕의 도성』(마 5:35)인 예루살렘에서 그분의 능력의 막대기인 철장으로 다스리시는 천년왕국 기간에도 여전히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지닌 채 주님의 강력한 군사 독재에 불만을 품는 악인들이 있을 것이며(슼 14:16-19),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서 『주의 원수들』(사 26:11)이라고 말씀한다. 그 악인들은 주님의 공의가 땅에 있고 세상의 거민들이 의를 배우는(사 26:9) 천년왕국 때에 주님의 자비로운 은총 속에서도 의를 배우지 않을 것이며, 주님의 위엄을 보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다(사 26:10). 그들은 천년왕국에서 높임을 받으시는 주님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시기할 뿐인데, 그러한 자들은 천년왕국의 끝에 이르러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잠시 풀려나는 사탄이 일으킬 최후의 반역에 가담하다가 하나님의 불에 의해 삼켜지는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사 26:11, 계 20:7-9).
본 시편은 3절에 가서 “주의 젊음의 이슬”을 노래한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들이 아침의 태로부터 오는 거룩함의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서 자원하리니 주께서는 주의 젊음의 이슬을 가지셨나이다』(3절). 대환란이 끝나고 천년왕국이 시작되는 영광스러운 “재림의 아침”(『아침의 태』)에(말 4:1-5, 삼하 23:4, 출 19:16, 시 49:14, 호 6:3),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초림 때와 달리 그분의 권능으로 오실 것이다. 자신의 큰 권능과 펴신 팔로 하늘과 땅을 지으신(렘 32:17) 분께서, 바로 그 위대한 권능으로 영원히 치리하기 시작하시는 것이다(시 66:7).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계 19:16)로 오시는 권능의 날이 이르면, 유대 백성들은 그 왕을 영접하여 『거룩함의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서』, 즉 거룩한 시온 산에서(사 24:23, 미 4:7), 거룩한 규범들을 가지고(마 5-7장, 사 2장), 거룩함을 요구하시는(슼 14:20,21) 거룩하신 왕께 자원하여 경배할 것이다. 『오 주여, 정녕, 주의 심판의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니 우리 혼의 사모함이 주의 이름에 있고 주를 기억함에 있나이다. 내 혼으로 내가 밤에 주를 사모하였으며, 정녕, 내 안에 있는 내 영으로 내가 일찍 주를 찾으리니, 이는 그때에 주의 공의가 땅에 있으며, 세상의 거민들이 의를 배울 것임이니이다』(사 26:8,9).
주님께서 세상의 거민들에게 의를 가르치며 땅을 공의로 통치하실 때 그분의 “젊음의 이슬”을 갖고 계실 것이다. “이슬”은 “아침”에 내린다. 즉 “재림의 아침”에 지니실 “젊음의 이슬”은 주님께서 원기를 회복하실 것을 뜻하는데, 이 점은 “연한 싹과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처럼 우아함도, 흠모할 아름다움도 없으셨던”(사 53:2) 상태로 고난을 겪으셨던 초림 때와 강한 대조를 이룬다. 주님께서는 젊음과 힘이 회복된 『경주하는 강한 남자처럼』(시 19:5) 재림하셔서 주님의 원수들을 권세와 능력으로 제압하시는 것이다.
“젊음의 이슬”은 교리적으로 중요한 표현이지만, 그 말씀을 읽는 그리스도인에게 “영적으로” 귀한 교훈을 준다. 왜냐하면 주님을 섬기는 “청년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젊음의 이슬”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젊음은 인생의 특정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는 말이 있다. 몸은 젊지만 마음이 늙어 지팡이 짚고서 거동하는 것처럼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백발의 노인임에도 마음에 늘 푸른 봄의 생명력이 움트는 사람이 있다. 한 해가 다 지나갔다고 죽음에 한 발짝 더 다가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새해의 “푸른 봄”을 자신의 “청춘”(靑春)으로 삼아 주님을 위해 어떤 잎을 틔우고 어떤 꽃을 피울까를 스스로 기대해 보는 성도, 그가 바로 팔십오 세의 나이에 “젊음의 이슬”을 지녔던 “칼렙”과 같은 사람이다. 『이제 보소서, 주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래로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방황하던 동안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십오 년간을 나로 살게 하셨나이다. 이제 보소서, 오늘에 내가 팔십오 세니이다. 나는 모세가 그 날 나를 보내었을 때처럼 오늘에도 여전히 강건하며 나의 힘이 그때처럼 지금도 강건하여 전쟁을 위하여 나가고 들어올 수 있나이다』(수 14:10,1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은 “젊음의 이슬”을 지녀야 한다. 왜냐하면 다시 오실 주님께서 『젊음의 이슬』(3절)을 지니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나이를 불문하고 “영적 젊음”을 유지함으로써 재림을 대비해야 하는데, 겉 사람은 썩어질지라도 속 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짐으로써(고후 4:16) 그 일을 이룰 수 있다.
세월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영원한 생명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영원한 생명에는 물리적 쇠퇴의 법칙이 작용하지 않으며, 어떤 외부 힘도 영향을 줄 수 없다. 이러한 생명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젊음의 원기로 가득하여 젊은 날의 신선함을 지닐 수 있다. 저물어가는 세상에 일말의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곧 떠오르실 『의의 태양』(말 4:2)을 향한 기대로 마음은 무한히 팽창한다. 오직 주님만을 앙망하여 자기의 힘을 새롭게 한다면(사 40:31) 청년 때의 열매를 노년에도 맺을 수 있으며(구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 언제나 영이 강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현 세상은 죄로 죽어 있다. 하지만 재림 때의 세상은 아침 이슬에 젖어 맑게 반짝이는 숲처럼 살아나 영롱하게 빛날 것이다. “젊음의 이슬”을 가지신 분께서 오시는데 왜 사막이 장미처럼 피어나지 않겠는가!(사 35:1)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리니 그들이 나의 죽은 몸과 함께 일어나리이다. 흙에 거하는 너희는 깨어서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수풀의 이슬 같으니 땅이 죽은 자들을 던져 버릴 것임이니이다』(사 26:19). 이와 같이 세상에 생명을 주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키세덱의 계열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불리신다. 『주께서 맹세하셨으니 후회하지 아니하시리라. “너는 멜키세덱의 계열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4절). 『이 멜키세덱은 살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아브라함도 전체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드렸으니, 그의 이름을 해석하면, 첫째로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 곧 화평의 왕이라』(히 7:1,2).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멜키세덱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동시한 소유한 인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주님께서도 선지자(초림)와 제사장(교회 시대)과 왕(재림)의 직분을 소유한 분이시며, 이 “왕”께서 재림하시면 『주의 오른편에 계신 주께서 그의 진노의 날에 왕들을 쳐부수시리라.』(5절)라고 예언되어 있다. 본문 6절도 『그가 이방 가운데서 심판하실 것이요, 시체들로 그곳들을 가득 채우시며 여러 나라의 머리들을 상하게 하시리라.』(아마겟돈 전쟁)라고 예언한다.
『그가 길에 있는 시냇물을 마시리니 그러므로 그가 머리를 드시리라.』(7절)라는 말씀은 수수께끼 같지만, 주님께서 재림 때 시냇물을 마시듯 그분의 젊음을 새롭게 하실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시냇물을 마신 후 머리를 드신 주님께서는 그분의 일을 담대하게 계속해서 수행해 나가실 것이다. 바로 이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 또한 “젊음의 이슬”을 머금고 담대하게, 계속 섬겨 나가야 한다. B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