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2 - 야곱의 고난의 때와 새 언약 (예레미야 30,3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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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의 예언은 30장에서부터 당분간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다. 이제까지 심판 일변도였던 메시지가 회복의 예언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민족에게 내리는 바빌론 침략이라는 심판이 종료되는 것은 아니다. 30,31장은 어느 왕 때라는 구체적인 시대적 배경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32장에서 시드키야와 35장에서 여호야킴을 언급하는 것을 보니 아직 그들 왕들과 연관해서 심판이 내려지는 기간에 주어진 예언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아직 심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회복을 예언하는가? 그 예언을 듣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심판을 벗어난다는 어떤 희망을 주고자 함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회복을 예언하신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회복은 미래에 속한 것이며, 또한 심판을 전제로 둔 회복이기 때문이다.



1. 이스라엘의 회복의 근거 : 대환란



  예레미야 30:3은 이렇게 말씀한다. 『보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사로잡힌 자들을 다시 데려올 날들이 오리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로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민족들에게 쫓겨나 고난당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은 분명 소망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분명히 "돌아온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사로잡힌"이라는 말이 전제가 되어 있다. 따라서 심판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 예언은 여전히 그들의 고난을 전제로 하는 말씀이다.

  예레미야가 예언하는 심판은 물론 바빌론 침공에 따른 예루살렘의 멸망이다. 하지만 그 심판은 그것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예루살렘 파괴를 말하는 예레미야의 모든 예언들은 대환란으로 귀결된다. 특히 여기 30장에서 대환란은 매우 직접적으로 예언된다.



  1) 여인의 진통

  30:6을 보라. 『너희는 이제 물어 보라, 아이로 진통하는 남자가 있는지 알아보라. 내가 보니 마치 진통하는 여인처럼 남자들이 각기 자기 손으로 허리를 짚고 모든 얼굴들이 창백하게 변하는 것은 어쩐 일이냐?』

  본문은 대환란에 대한 예언이다. 본문뿐 아니라 성경에서 "여인의 진통"으로 비유되는 고통은 대부분 대환란에 대한 예언이다(사 21:3; 66:8, 렘 6:24, 미 4:9; 5:3, 살전 5:3). 여인의 진통이 대환란으로 비견되는 것은, 진통이란 특별한 사고나 박해를 제외하고 인간이 자연적으로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 중 최고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대환란도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고통이다. 마태복음 24:21은 『이는 그때에 대환란이 있으리니, 그와 같은 것은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없었으며, 또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말 그대로 이보다 더 큰 고난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진통이 대환란과 비견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진통은 비록 고통스럽지만 곧이어 탄생의 기쁨을 맛보기 때문이다. 대환란 역시 그 자체는 매우 고통스럽지만 곧이어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이라는 큰 기쁨을 맛보게 된다. 이사야 66:8은 『누가 그러한 일을 들었으리요? 누가 그러한 일들을 보았으리요? 땅이 하루에 생겨날 수 있으며, 한 민족이 순식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자마자 그 자녀들을 낳았도다.』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회복된다는 말씀은 진통 후에 자녀들이 태어나는 것으로 비유되었다. 따라서 대환란 후 이스라엘이 그들의 메시야와 함께 새롭게 출발하는 모습은 그 민족의 탄생과도 같이 기쁠 것이다.

  하지만 이사야가 진통을 출산의 기쁨과 연결시켜 설명한 것과 반대로, 예레미야는 "고통"으로서의 진통을 훨씬 강조한다. 이는 예레미야가 대환란을 주로 선포하는 선지자이기 때문이다.



  2) "야곱"의 고난의 때

  대환란을 의미하는 또 하나의 용어는 "야곱의 고난의 때"(the time of Jacob`s trouble)이다. 『슬프도다! 그 날이 크므로 어떤 때도 그와 같지 않나니 그 날은 야곱의 고난의 때라. 그러나 그는 그 고난에서 구원을 받으리라』(30:7). 다니엘은 이것을 "고난의 때"(a time of trouble, 단 12:1)라고만 묘사했다. 이것은 대환란의 특징 자체가 "고난"임을 보여 주는 용어이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여기서 "야곱"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의 주된 대상이 "야곱"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환란이 비록 전 세계적으로 있겠지만 그 주요 대상은 유대인임을 보여 준다. 마태복음 24장에서 대환란을 말할 때에도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라.』(마 24:16)고 말씀하심으로써 유대인에 대한 경고를 강조했다. 이와 같이 대환란은 유대인을 향해 있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거점도 예루살렘에 있을 것이며(마 24:15) 성전에서의 희생제사, 즉 유대인들의 종교를 철저히 짓밟을 것이다(단 9:27).

  또한 "야곱"의 고난이라는 것은 이 고난이 "교회"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고난은 교회, 혹은 그리스도의 몸의 고난이라고 묘사되지 않으며, 오직 "야곱의 고난"이라고 묘사된다. 따라서 교회는 대환란에 들어가지 않는다.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야곱"은 이 고난을 통해 구원을 받겠지만, 교회는 대환란이 아니라 그 어떤 고난이라 할지라도 그 고난을 통해 구원받지 않는다. 때때로 많은 고난들이 교회를 온전케 하기 위해 주어지긴 했지만, 그것은 대환란이 아니었다. 여기서 "야곱"은 육신에 따른 이스라엘을 말한다. 간혹 사람들은 교회를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고난"이라고 하면,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의 고난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해석의 여지도 남겨 두지 않기 위해 『야곱의 고난』이라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영적 야곱"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야곱은 반드시 이스라엘 12지파를 가리킨다.

  교회, 즉 이 시대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대환란 이전에 들림받는다(휴거). 그들은 그들의 믿음과 행위가 훌륭하든 그렇지 않든 한 사람도 대환란에 남지 않고 휴거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교회에 다닌다고 휴거되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 받고, 그분을 구주로 믿고 영접한 성도들만 휴거된다. 거듭나지 않고 교회 생활을 수없이 했다 하더라도, 집사나 장로나 혹은 목사라 할지라도 거듭나지 못했다면 그는 휴거되지 못하고 지상에 남아 대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다. 그 날에는 수많은 교인들이 가짜 신자였음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3) 돌이킬 수 없는 대환란

  30:12은 이렇게 말씀한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상함은 치유될 수 없으며 네 상처는 심하도다.』 이 말씀은 이 고난이 결코 취소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모든 죄들은 철저하게 회개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당하게 될 고난은 취소될 수 없다. 왜냐하면 너무나 뿌리깊게 곪아서 치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네 소송을 변호할 자가 아무도 없나니 너를 싸매 줄 자도 없을 것이요, 너를 치유해 줄 약도 없으리라』(13절). 이는 바빌론 침공도 마찬가지며 대환란도 마찬가지다. 예레미야 시대에 바빌론 침공은 몇몇 사람의 회개 기도로 멈춰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레미야가 예언하고 있는 시대에도 그들은 계속 죄를 지었다. 대환란도 마찬가지다. 지금 분명히 대환란은 다가오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있는가? 물론 이스라엘 가운데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간혹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 여전히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지옥의 백성들이다. 지금 그들이 자기 땅에 모여 있다고는 하나,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 조상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 아마 지금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오신다면 그들은 또다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소리칠 것이다. 그들이 대환란을 겪지 않는다면, 적그리스도의 잔혹한 통치를 직접 겪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회개하지도 회복되지도 않을 것이다.



2. 이스라엘의 회복의 근거 : 새 언약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의 상태에 놔 두지만은 않으실 것이다. 아무도 치유못할 그 죄악을 하나님께서 치유시켜 주실 것이다. 『주가 말하노라. 내가 너에게 건강을 회복시켜 주고 내가 너를 네 상처들에서 치유시켜 주리니』(30:17). 그 상처가 회복될 때 이스라엘은 다시 그 예전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그 지위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30:22), 『주가 말하노라. 바로 그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족속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31:1). 이 관계성은 율법과 함께 주어진 이스라엘의 특별한 지위이다(레 26:12). 하나님께서는 율법이라는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을 위대한 민족으로 삼으셨다(출 19:5,6).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이 언약 관계에 남아 있게 된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지속적인 범죄로 그 언약을 파기시켰다. 그 결과가 바빌론 포로됨이고, 궁극적인 결과가 대환란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신 후 회복하시는데, 회복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원래의 지위로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다시 언약을 맺으실 것이다.

  이 언약을 "새 언약"(New Covenant)이라 한다(31:31-34). 혼동하지 말 것은, 이 새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로 맺은 새 언약(New Testament, 즉 "신약," 마 26:28)과 다르다는 것이다. 피로 맺은 새 언약은 행위가 아닌 은혜에 따른 언약이며,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과 맺으신 언약이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예언한 새 언약은 그것과 다르다.

  1) 이 새 언약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 즉 유대인과 맺으신다(31절).

  2) 이 언약은 율법이라는 언약이 파기된 후 새롭게 맺어지는 언약이다(32절). 피로 맺은 새 언약(New Testament)은 유대인과만 맺은 율법에서 벗어나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성도와 맺은 언약이지만, 예레미야가 예언한 이 새 언약(New Covenant)은 유대인과 맺는다는 점은 율법과 같으나 율법이 파기된 후 그보다 더 좋고 더 새롭게 맺어지는 언약이다.

  3) 이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이 그들의 "마음속에" 기록된다는 점에서 옛 언약(율법)보다 우월하다(33절). 이 점에서는 이 언약이 은혜에 따른 신약과 유사하다(고후 3:3).

  4)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이 회복된다(33절). 율법에서 주어진 그들의 원래 지위가 회복되는 것이다.

  5) 사람들에게 "주를 알라."고 더 이상 가르치지 않는다. 즉 이 언약 아래서는 더 이상 복음을 전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34절). 이 점에서 이 언약은 피의 새 언약(New Testament)과 완전히 다르다. 그분의 피로 새 언약을 맺은 우리 성도들은 항상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모르고 있다. 반면 이스라엘과 이 새 언약이 맺어질 때는 모든 사람이 주를 알게 될 때이다. 그 때가 언제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이다. 천년왕국에서는 모두가 주님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때에는 복음을 전파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새 언약(New Covenant)은 천년왕국을 이끄는 언약이고, 피로 맺은 새 언약(New Testament)은 교회 시대를 이끄는 언약이다.

  6)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 하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용서할 것이며,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다(34절). 율법이라는 옛 언약은 그들의 죄들로 파기되었다. 그래서 새 언약을 맺으실 때엔 그 죄들을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스라엘은 대환란이라는 심판을 받으면서 그들의 죄들을 다 해결한다. 이사야 40:2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녀[이스라엘]의 죄악이 용서받았나니 이는 그녀가 그녀의 모든 죄에 대하여 주의 손에서 배로 받았음이라.』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심판을 통해 새로워진다.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는 매우 강하다. 해와 달이 비추고 파도가 치는 법칙이 존재하는 한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을 것이다(31:35-36).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셨다고 말하는 무천년주의의 주장은 거짓 교리임이 판명되었다.

  30:9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그들은 이방의 결박을 끊고 하나님과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길 것이다. 많은 무천년주의자들은 예레미야의 이러한 "회복" 예언들이 바빌론에 사로잡혀간 포로들이 70년 만에 돌아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 혹은 그 이후의 어떤 역사를 보더라도 이스라엘에 다윗의 보좌가 회복된 적은 없었다. 다윗의 아들로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 때에 그 보좌를 회복하실 수 있었지만 그분은 거절당하셨고, 결과적으로 그 보좌는 예루살렘에 회복되지 못했다. 더욱이 31장에서는 에프라임, 즉 북왕국에 속한 지파들에 대한 회복도 말씀하시는데(31:5-9), 이들 역시 회복된 적이 없다. 바빌론 포로 회복은 유다에 대한 회복이었다. 따라서 이 예언은 단순히 바빌론 포로 회복에 적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먼 미래에 속한 것이며, 곧 그리스도의 재림 때 성취될 예언이다. 이 때에 대해서 30:24은 "훗날들에"(in the latter days)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는 심판은 그들을 온전케 하시는 도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치셨지만, 그들을 여전히 "아들"로 기억해 주신다. 『에프라임이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냐? 그가 기뻐하는 자식이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한 이후로 아직도 그를 열렬히 기억하고 있도다』(31:20). 22절에서는 이스라엘을 "타락한 딸"이라 말씀하신다. 비록 타락하긴 했지만 여전히 "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꾸짖으시기를 마치 아버지가 기뻐하는 아들에게 하는 것같이 하심이라.』(잠 3:12)는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된다(히 12:5,6 참조). 그런데 이와 같이 징계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한가?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나의 창자가 그로 인하여 괴로우니...』(31:20)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의 이러한 심정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향한 것만은 아니다. 이 시대의 그분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역시 이러한 심정을 전하신다. 본문이 비록 교리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루고 있지만, 영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우리 역시 범죄함으로 하나님께 징계를 받기 때문이다. 징계의 목적은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징계를 통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요, 징계를 받는다 해도 그분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해 징계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은 이스라엘을 향할 때와 동일하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설교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이 되는 이유인 것이다.  BB
출처 :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0년 12월  (통권 225 호)   page :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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