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에서의 프로테스탄트의 생성과 발전 - 1614년의 학살고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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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는 처음부터 카톨릭의 세력하에 있었으며, 복음이 들어오게 된 것은 헨리 8세 때였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무지 속에서 터무니없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일랜드에 프로테스탄트가 소개된 것은 영국인 조지 브라운(George Browne)의 공로가 컸다. 그는 더블린(Dublin)의 주교로 그 이전에는 어거스틴 수도사였다.

헨리 8세는 영국에서 수도원 설립을 금했다. 이것으로 인해 더블린에 있던 두 개의 성당에서도 형상들과 종교적 유물들이 제거되었다. 얼마 후 브라운은 헨리 8세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교황의 지배를 떨쳐버리기로 했으며, 그를 행정관으로 임명한다는 편지를 크롬웰에게서 받았다. 그러나 아마그(Armagh)의 주교인 조지가 이 일에 격렬히 반대했다. 그는 교황의 통치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부었으며, 아일랜드는 로마 주교의 소유이며 왕의 선조들도 교황으로부터 통치권을 받았다고 말했다.

다음 해에 의회가 소집되었으며 결국 헨리 8세가 교회와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 결정되었다. 얼마 후 교황은 아일랜드에(아마 그의 대주교와 그의 성직자들에게) 칙령을 보내어 왕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을 파문시켰다. 에드워드 6세가 영국 왕위에 오른 후 그는 영국 국교회의 전례의식이 아일랜드에서도 행해져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영국 국교회의 공식 기도문이 더블린의 교회에서 처음 사용된 바로 다음날 카톨릭편에서는 사악한 간계가 계획되고 있었다. 거기에는 손에 갈대를 들고 머리에 가시관을 쓴 대리석으로 된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었는데, 영국식 예배가 회중과 성직자들 앞에서 드려지는 동안 가시관의 틈에서 피가 흘러 그 형상의 얼굴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이에, 이 사기극을 꾸민 사람들이 소리쳤다. “보라, 우리 구세주의 형상에 흐르는 피를! 교회에 이단이 침투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너무나 기적적이고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통해 하나님께서 불쾌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고 일반 대중들은 공포에 질렸으며, 즉시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는 지옥에서 발단한 것이며 구원은 오직 그들 자신의 무오한 교회에만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의식이 깨인 사람들에게는 이 사기극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였지만 무지한 아일랜드인들의 마음에는 이것이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들은 이 사기극을 꾸민 자들의 목적에 부합하게 되었다.

제임스 왕의 평화로운 통치기간을 이용해 카톨릭은 힘을 키워 갔으며 찰스 1세때는 그들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런 이유로 1629년 공식적인 카톨릭 의식과 제사행위가 금지되었다. 그러나 곧 로마 사제는 더블린 시에 새로운 카톨릭 대학을 세웠으며 여러 곳에 수도원과 수녀원을 세웠다. 그곳에서 자주 모임을 가지면서 1641년 오닐(O'Neal)은 그의 가족과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끔찍한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이 계획이 실행되기 얼마 전 아일랜드 카톨릭은 그들 종교행사의 자유를 요구했지만 영국 상하원은 둘 다 영국 내 카톨릭의 허용을 금했다.

그 계획은 왕국 전체의 대규모적인 반란과 더불어 모든 프로테스탄트를 예외 없이 다 살해한다는 음모였다. 대학살의 날은 1641년 10월 23일로 정해졌다. 그 날은 예수회의 창시자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를 기념하는 날이었다. 이 계획을 완벽하게 성사시키기 위해 카톨릭교도들은 프로테스탄트를 방문하여 지금까지보다 더욱 친절함을 보여주었다. 이 음모는 겨울이 올 때까지 지연되었는데, 그 이유는 겨울에는 영국에서 군대를 보내는데 큰 어려움이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프랑스 사역자인 리첼리에(Richelieu) 추기경은 공모자들에게 상당한 물자와 인적 자원을 약속했다. 많은 아일랜드 장교들은 이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카톨릭 형제들과 연합하겠다는 강한 확신을 보여주었다. 이 계획이 실행되기 전날, 이 음모는 아일랜드인 오웬 오코넬리(Owen O'Connelly)에 의해 발견됐으며 이 일의 주모자였던 맥과이(M'Guire)경이 체포되었다. 다행히 왕국의 수도는 보존된 것이다.

그러나 계획된 비극은 왕국 전체에 흩어진 공모자들에 의해 정해진 날 아침에 강행되었다. 길을 가던 모든 프로테스탄트는 즉시 살해되었다. 나이도, 성별도, 신분도 가리지 않았다. 평화 속에서 살아오던 영국인들이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가장 가까운 이웃들에게 살해된 것이다. 죽음은 차라리 가장 작은 형벌이었다. 온갖 잔인한 고문들, 마음의 고뇌, 절망 등은 죽음보다 더한 것이었다. 완고하고 자비심없는 카톨릭교도들은 그들의 손으로 피를 쏟자마자 매일 끔찍한 비극을 되풀이해 나갔다. 예수회 회원들, 사제들, 수도사들은 무지한 아일랜드인들을 더욱 부추겨서 이 계획은 왕국의 발전과 카톨릭의 명분을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할 것이라고 선동했다. 프로테스탄트는 이단이며, 더이상 살도록 허용되어서는 안되며, 영국인을 죽이는 것은 개 한 마리를 죽이는 정도라고 떠들고 돌아다녔다. 또한 영국인들을 도망시키거나 보호하는 것이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라고까지 했다.

카톨릭교도들이 롱포드 성과 도시를 포위했다. 그 도시는 프로테스탄트들이 사는 곳이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목숨을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도시 사람들이 나타나자마자 포위자들은 그들을 공격했다. 그들의 사제가 영국 프로테스탄트 목자의 배를 가르는 것을 신호로 그 뒤를 이어 사람들을 매달아 죽이기도 하고, 칼로, 총으로, 혹은 도끼로 많은 사람을 살해했다.

스리고(Sligo) 부대도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들도 목숨을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했다. 처음에 그들은 감옥에 수감되었고 얼마후 다리 위에서 급류속으로 밀쳐져 모두 죽었다. 수도사들이 손에 성수를 들고 와서 그 강에 물을 뿌렸다. 이단의 죽은 몸과 피로 오염된 강을 깨끗이 한다는 것이다.

리스굴에서는 150명 이상의 사람들이 불에 태워졌다. 모니아 성에서는 최소한 100명이 칼로 죽임을 당했다. 툴라 성에서도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마귀만이 생각해낼 수 있는 끔찍한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말꼬리에 사람을 묶어놓고 말을 전속력으로 달리게 해서 죽이기도 했다. 높은 교수대에 매달린채, 밑에 불을 피워서 일부는 질식으로, 일부는 교수형으로 죽기도 했다. 여자라고 해서 이들의 무자비하고 광분한 박해를 피할 수는 없었다. 많은 여인들이 너무도 잔인한 방법으로 죽어갔다. 어떤 이들은 튼튼한 기둥에 묶여, 허리까지 옷이 벗겨진채 무자비하게 창으로 가슴이 도려내어져 피를 흘려 죽을 때까지 내버려졌다.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들이 자궁에서 끄집어내져 그들의 분노의 희생제물이 되었다. 많은 어머니들이 발가벗겨진채 나무에 매달려 몸이 찢겼고 무죄한 아기들이 개와 돼지에게 던져졌다. 끔찍한 장면을 더 끔직하게 하기 위해 그들은 그 남편들에게 이런 모습을 억지로 보게 만들었다.

이스센스케아스에서는 백명 이상의 스코틀랜드 프로테스탄트들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일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포타다운 다리에서 강제로 물속으로 던져졌다. 강변에 기어오른 사람들은 머리가 잘려나갔다. 같은 지역에서 적어도 4천명이 익사당했다. 무자비한 카톨릭교도들은 먼저 사람들을 옷을 벗긴 후 그들을 죽이려고 정해놓은 장소로 짐승처럼 그들을 몰고갔다. 피로와 허약함으로 뒤에 처진 사람들은 창과 검으로 찔렸다.

어떤 곳에서는 140명의 영국인들이 극도로 추운 날씨에 완전히 발가벗겨져 수마일을 끌려가서 같은 장소에서 모두 살해되었다. 어떤 이들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어떤 이들은 불에 태워졌고 어떤 이들은 산채로 매장되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안전한 통과를 약속한 후 그들이 안심하고 자신의 길을 가면 적당한 장소에서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그들을 살해했다.

115명의 사람들이 페림 오닐(Phelim O'Neal) 경의 명령으로 포터다운 다리까지 와서 모두 강제로 물에 빠뜨려졌다. 캠프벨(Campbell)이라는 한 여인이 도망갈 가능성이 없는 것을 알고 카톨릭교도 대장 중 하나를 팔로 안아서 함께 물 속에 빠져 익사했다.

킬리맨(Killyman)에서는 48가구가 학살당했다. 그 중 22명은 한 집에서 불에 태워졌다. 킬모어(Killmore)에서는 약 200가구가 있었는데 그들의 돈이 있는 곳을 말할 때까지 화형대에 묶여 있다가 말한 후에 죽음에 처해졌다. 전체 마을이 도살장이 되어서 칼, 불, 물, 기아, 그리고 다른 가장 잔인한 죽음으로 짧은 시간내에죽어 갔다.

어떤 이들은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서 굶어죽기도 했다. 카셀(Casel)에서는 프로테스탄트를 더러운 지하 감옥에 함께 수주간을 몰아 넣고는 잠시 풀어준 뒤 잔인하게 난도질했으며 길에서 재미삼아 그들을 죽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땅에 머리를 박아서 매장되기도 했다. 이들은 비참함을 더하기 위해, 고통당하는 그들을 조소했다. 앤트림(Antrim)에서는 하루 아침에 954명이 살해되었으며 그 뒤 1200명이 더 살해되었다.

리즈니게리(Lisnegary)에서는 24명의 프로테스탄트를 한 집에 몰아 넣고 불을 질렀다. 또 다른 잔인한 행동 중의 하나는, 영국 여인의 두 아이를 빼앗아 그 여인 앞에서 그들의 뇌를 부숴뜨린 후 그 여자를 강에 던져 버린 것이다. 킬케니(Kilkenny)에서는 모든 프로테스탄트가 죽음을 당했다. 그들은 어떤 영국 여인을 성한 뼈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구타한 후 시궁창에 던져버렸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녀의 6살난 여자아이를 데려다가 배를 갈라 그 어머니에게 던졌다. 어떤 남자를 강제로 미사에 참여하게 한 후 배를 가른 후 그대로 내버려 두기도 했다. 어린 아이의 뇌를 부숴서 돼지에게 먹게 하기도 했다.

일곱명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를 잡아다가 그들 중 하나를 시장 사거리에 데리고 갔다. 입에 재갈을 물린 다음 그의 뺨을 귀까지 잘라서 그 앞에 성경 한장을 놓고서 입이 충분히 커졌으니 설교를 하라고 강요했다. 파우어스카우트에 있는 교회에서는 강단과 성경들을 불태웠다. 성경을 더러운 물에 적셔서 프로테스탄트의 얼굴에 던지며, “너희가 좋은 교훈을 좋아한다는 걸 알지. 여기 아주 훌륭한게 있군. 내일 와보라구. 이것만큼 훌륭한 설교를 들을 수 있을테니.”라고 조소했다.

어떤 곳에서는 프로테스탄트의 눈을 뽑고 손을 잘라서 들로 보내어 거기서 헤매며 비참한 최후를 맞게도 했다. 젊은이들에게 강제로 부모를 강에 밀어 넣게 했으며, 아내들에게 남편을 매다는 일을 돕게 했으며, 아이들의 목을 찢는데 어머니들에게 자기 아이들의 목을 부수는 일을 돕도록 강요했다. 크로우니스에서는 17명이 산채로 매장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한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BB
출처 :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9월  (통권 30 호)   page :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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