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를 가장한 예수회의 활동은 살인과 박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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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 종교회의는 바울 3세(Paul III)에 의해 소집되었다. 당시에는 영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에 이탈리아인들은 폴(Paul), 존(John) 등과 같은 영국식 이름을 외래어로 받아들여야 했는데, 아마도 러시아가 영국보다 우월하였다면 보리스(Boris), 이반(Ivan), 블라디미르(Vladimir) 등과 같은 이름이 등장했을 것이다.

이 종교회의는 피의 메리 여왕이 그리스도인들을 불태워 죽이기 십 년 전인 1545년 겨울 이태리 도시에서 소집되어 1546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구성원의 75%는 이태리인들이었고 교황과 예수회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회의에서 확인된 사항들이 법률적 효력을 얻으려면 교황의 “교서”(Bull)가 있어야 했다. 이 종교회의에서 중세의 신학이 독재적 교리들로 바뀌었고, 지금 계속해서 카톨릭과 그들의 교리는 세상 정부와 권력과 정치가들을 지지하고 있다.

트렌트 종교회의는 로마서 3:15-23에 나오는 이교도들의 악행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즉, 그들은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게 됨을 믿었던 사람들 33명, 물로 인한 중생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 14명, 교황이나 추기경들이 믿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그 어느 것도 믿지 않았던 65명 이상의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저주했다.

금서목록인 ‘지침서’는 카톨릭의 이단들(?)에게는 베스트 셀러의 목록이 되어 버렸다.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종교개혁자들과 두 명의 침례교도와 루터, 즈윙글리, 칼빈, 훕마이어(Hubmaier), 쉬벤크펠트(Schw- enkfeld) 등의 저술이었다. 책 중의 책인 “성경”(the Holy Bible)에 관하여 법적으로 허용할 것인지 금지시킬 것인지에 관한 강력한 질문이 들어 왔을 때, 트렌트 종교회의에서의 그들의 태도는 마치 고양이가 우박을 피해가듯이 교묘히 답변을 피했다. 이로 인한 그들의 최종적인 지침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성경(the Holy Bible)이 대중이 쓰는 언어로 번역되어지고 아무에게나 무분별하게 읽혀진다면, 그로 인한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이 많을 것이 분명하므로(그들은 이로 인해 사람들이 자각하여 카톨릭 교회가 저질렀던 더럽고 썩어빠진 죄악들이 드러날 것을 알았기에 이들은 그것을 막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항이 채택되어야만 한다.” 즉, 사람들은 신부나 성직자들에 의해 허용되지 않은 성경을 볼 수 없고 다만 유일하게 허용된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의 원문에서 나온 카톨릭 성경(카톨릭 번역본)만을 볼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지침은 다음의 말로 표현되었다. “성경을 읽는 데 있어서 성직자의 허가가 있어야 하고, 그 성경은 ‘카톨릭 저자에 의해’ 대중적인 말로 번역된 것이라야 한다.” 그러나 어떠한 카톨릭 저자도 안티옥의 표준원문(Textus Receptus; 베자, 에라스무스, 콜리네우스, 스테파누스, 엘지버)은 손도 대지 않았다. 모든 카톨릭 저자들은 밥 존스 대학(Bob Johnes University), 샌 프란시스코 신학 대학원(San Fransisco Theolo- gical Seminary), 풀러 신학 대학원(Fuller Seminary) 등에서 추천한 변개된 헬라어 원문을 사용한다.

<킹 제임스 성경>이나 <마틴 루터 성경>을 읽다가 발각되는 경우에는 파문과 함께 저지른 어떠한 죄에 대해서도 사면해 주지 않는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 , , 혹은 의 변개된 원문과 또 그와 같은 종류의 변개된 ‘성경’을 읽다가 들켰을 경우에 대한 형벌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허락만 받으면 그뿐이었다. 결국 이러한 ‘성경들’은 로마 카톨릭의 성경인 것이다.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에 관하여 모세임(Mosheim)은 그의 역사책(Vol.XXXIV, XXXV)에서 말하기를 예수회 신부들은 예배가 진행되는 한 예배에 대한 동기를 무시했고,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죄를 범했거나 우연히 하나님의 법을 망각함으로 죄를 범했을 경우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러한 교리들로 인해 도덕과 관련이 없고 또한 비도덕적인 상상할 수 없는 모든 형태의 사행이 유발되었다. 죄의 본성이라는 성경적 관점에서 조명해 볼때(롬 3:8; 요일 5:17) 그들은 결국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일단의 교활한 기회주의자들(예수회 회원들)이 남긴 ‘선교’의 업적은 결국 재난으로 끝났다. 그 ‘선교’에는 사탄적 발상인 두 가지 고정관념이 있었기에 그들의 개종자들로 하여금 그들보다 두 배나 악한 지옥의 자식들로 만든 것 외에(마23:15)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두 고정관념 중 하나는 하나님과 교회의 영광을 위한다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로마 카톨릭을 제외한 어떠한 종교를 묵인하는 어떤 국가든지 뒤집어 엎는 데 있어서 교황은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인도에서 예수회 신부인 노빌리(Nobili)는 사람들을 얻기 위해 자기는 브라만(Brah- man)이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로마로부터) 로마의 브라만은 인도의 브라만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날조된 자료를 만들었다. 그 날조된 자료에 대하여 인도 관료들에게 맹세할 때 그의 혈통은 이교도 신(神)인 “브라마”(Brahma)로부터 기원한다고 하였다.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어떠한 예수회 신부도 진실을 말하는데 있어서 맹세를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

중국에서의 예수회 신부들은 그들의 회심자를 빨리 얻기 위해 각종 이교도 예배의식에 동참하였다. 이러한 때에 몇몇 도미니칸 신부들(Dominicans)과 프란시스칸 신부들(Fransiscans)은 그것을 반대했다. 그들은 절대무오한 교황(Innocent X, 1645)의 지지를 얻었지만, 두번째의 절대무오한 교황(Alexander Vll, 1656)에 의해 즉시로 번복되었다. (이 절대무오한 교황들은 무엇이 절대무오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동의하는데 있어서 종종 어려움을 겪는다.) 예수회의 중국 선교는 끝내 또 다른 절대무오한 교황에 의해 비난받았지만(1693), 셈의 후손인 중국인들의 면전에서는 비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카톨릭 교과서들을 거의 다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중국인들은 이 존경받는 교회가 최종의 종교 권위로 바뀌는 것을 알았다. 이 때부터 중국인들은 ‘정치적 권위’ 뒤에 도사리고 있는 카톨릭 교도들의 정체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다.

1500년에서 1900년 사이에 동양 등지에서 행해졌던 이러한 반 교회사적 카톨릭 선교활동에 대해서 반드시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점은 카톨릭 선교활동과 수반되어 일어났었던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이다.

첫째, 이교도들이 행하였던 우상 숭배, 의식, 음악, 상징, 전통, 습관 등을 그대로 존속시켰다.

둘째, 모든 국가에서 정부 관료들을 정치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가 로마로부터 있었다. - 이들은 실제로 쿠바, 멕시코, 중남미에서 성공하였다.

셋째, 수도승, 수사, 사제 등에 의해 확장된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그 곳에는 어떤 종류의 성경지식도 없었다. 카톨릭 관점에서 쓰여진 1500-1900년 간의 ‘기독교 확장’에 관하여 읽노라면 마치 A.D.300-900년의 샤를마뉴(Charlemagne)의 ‘유럽의 카톨릭화(Roman- izing of Europe)'를 다시 읽는 것과 같다.

한편 예수회에 의한 “반 종교개혁”(역사가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지만)의 결과는 40만 명이 넘는 성경대로 믿는 프로테스탄트들을 죽이는 “거대한 살륙의 재현”이었다. 항상 그랬듯이 이것 역시 국가 통치자들(왕, 황제, 군주, 귀족 등)에 의해 자행되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서도 교황이 그런 끔찍한 살인자라는 의심을 사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교황들은 카톨릭 주장 대신에 어떤 성경적 관점을 취하는 그 누구에 대해서라도 ‘칼을 휘두를’ 무력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보다 “행동”이 빨랐다는 것을 그들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시기에(1500-1900) “사탄의 신부”는 모든 것을 차려입고 피묻은 가슴, 손, 옷자락, 입을 포함한 모든 부분을 보석들로 치장하였다(잠30:20).

챨스 5세 황제(1500-1558)는 스파이얼스 칙령(Edict of Spires)을 내렸는데, 이는 ‘거룩한’ 전 로마 왕국은 침례교도들에 대한 숙청을 계속하라는 명령이었다. 그가 말한 “침례교도”란 유아세례를 무시한 사람을 가리켰다.

네덜란드에서는 챨리(Charlie) 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교수형당하고, 참수당하고, 불타 죽고, 또 산 채로 매장당하였다. 1535년 6월 10일 그는 전국의 모든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했다. 만일 신앙을 철회한다면 물론 태워 죽는 대신 칼로 죽임을 당하는 특혜를 부여하였다. 여자들은 산 채로 매장당하였다. 꼭 끼는 관 속에 뉘여져 밧줄로 목을 감기우고 관 밑의 두 구멍을 통해 나온 로프에 끌려졌다. 관 뚜껑 밑에서 몸부림치는 몸을 고정시키기 위해 세 개의 금속 막대가 양옆으로 끼워졌고 뚜껑이 못박혀졌으며 마침내 오물로 덮여버렸다. 어느 죄없는 여인은 금서인 라틴 성경을 읽다가 발각되어 고문당한 후에 목이 베어졌다. 어느 침례교도는 사형을 선고받고 얼어붙은 호수 위로 도망쳤다. 그를 쫓던 카톨릭병사들 중 하나가 얼음 밑에 빠져서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그 병사의 두 동료들은 그를 버리고 도망갔지만 그 침례교도는 되돌아와서 그를 구해 주었다. 그가 나오자마자 도망갔던 두 병사가 나타나 그를 체포하여 감옥에 넣은 후 결국 다음 날 화형시켜 버렸다.

성경을 가르친다는 소리가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침례교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두운 곳이건, 헛간이건, 덤불이건... 이들을 찾는 사냥꾼들은 달빛이나 별빛 속에서도 사냥감을 찾아 나설 정도였다. 챨스 5세 하에서 네덜란드에서만도 3만명 이상의 침례교도들이 죽었다. 기록되기를 “나라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으며, 고문으로 인한 고통소리는 끊임없이 들렸고, ... 죽은 시체들을 달아맨 교수대와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으며... 바로 그 공기는 악취로 오염되었고 모든 종각으로부터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무겁게 들렸다.” 이것이 씨프리안(Cyprian), 어거스틴(Augus- tine), 콘스탄틴(Constantine)이 저지른 걸작품이었다. 알바의 공작(Duke of Alva)은 그가 새로 창안한 고문기구를 보고 흡족한 듯이 바라보았다. 사람의 혀에다 죔틀나사를 돌려 박은 후에 그 혀 끝이 없어질 때까지 불로 지졌다. 고통의 비명을 지를 때 병사들은 그 절규에 찬 “훌륭한 노래”에 찬사를 보내었다. 과연 나사를 박는 카톨릭 교도가 “이기는 자”(마 16:16-18)인 그리스도 교회의 충성스런 아들이고, 희생자인 침례교도는 지옥의 문 앞에 줄지어 서 있는가? 만일 당신이 진정한 카톨릭 교도라면 최소한 이것을 믿어야만 한다.

이 시대에 스페인의 필립 2세와 네델란드의 알바의 공작 밑에서처럼 많은 성도들이 피로 물들었던 나라는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도 교황의 지휘 하에 피의 대 숙청이 일어났다. 이를 성 바돌로매 날의 대 학살(the St. Bartholomew's Day Massacre)이라고 부른다. BB
출처 :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11월호  (통권 20 호)   page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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