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악한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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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그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옥수수밭을 지나 가시는데, 제자들이 시장하여 옥수수를 따서 먹기 시작하더라.』



이 사건의 발단은 안식일 문제로 야기된다.



12:3-6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다윗과 그의 일행이 시장해서 하였던 일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오직 제사장들 외에 먹어서는 아니되는 차려놓은 빵을 자기와 일행이 먹지 아니하였느냐?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이 안식일이면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성전보다 더 위대한 이가 여기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범하는 문제에 있어서 자신이 정당하시다는 것을 다윗과 제사장들의 예를 통하여 증명하시는데, 다윗의 예는 사무엘상 21:1-6에 있고, 제사장들의 예는 민수기 29:32에 있다. 다윗은 그 당시에 사울에게 쫓겨다니고 있었는데, 마가복음 2:26에 따라서 다윗은 아비아달이 대제사장이었을 때, 그와 그의 무리가 배고파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부탁하여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성전의 빵을 먹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그러한 행동을 책망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과 다윗의 공통점은 둘 다 기름부음받은 상태로 “왕”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보좌를 차지하지 않은, 말하자면 망명상태에 있는 왕이라는 것이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지 한참 후에야 그 보좌를 얻게 되고, 그 동안 왕국을 통치하는 사람은 적그리스도의 예표인 사울이었으며, 다윗이 그 보좌를 얻은 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왕국이 영원하리라는 약속을 받는다(삼하7:12-16). 예수님도 왕국의 주인으로 나타나셨으나 2000년이 지난 후에야 이 땅을 다스리는 천국의 보좌를 받으실 것이다.

예수님의 초림때 왕국을 다스리던 사람은 역시 적그리스도의 유형인 헤롯이었고, 재림하시기 직전에도 왕국을 다스리는 사람은 적그리스도일 것이며, 예수님께서 왕국을 받으신 후에 그 보좌는 영원할 것이다.

왕과 제사장은 둘 다 기름부음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유형이다. 그리고 왕이신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Lord)가 되신다. 예수님은 여기서 자신이 왕이신 그리스도이심을 보이시는 것이다.



12:9-10 『주께서 그 곳을 떠나서 그들의 회당으로 들어가시니라. 보라, 거기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더라. 그들이 주께 물어 말씀드리기를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타당한 일이니이까?”라고 하니, 이는 그들이 주를 고소하려 함이라.』



본 장에서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직접적으로 자극받은 사건이 안식일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볼 때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율법, 그 중에서도 특히 의식법을 지키는데에 생애를 헌신하였다는 것이다. 율법을 굳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법과 규례를 지키는 의식법으로 나눈다면 안식일 준수는 의식법에 속하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대적할 때 도덕법 보다는 손씻고 먹어야 한다든지 안식일을 지켜야한다든지 하는 의식법 문제를 더 부각시켰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순간까지도 의식법에 “헌신”하였는데, 부정하게 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월절 양을 먹기 위해 이방인인 빌라도의 재판정에 들어가지 않았다(요18:28). 유월절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유형인 유월절 양을 자기들의 “정결함” 속에서 먹으려고 의식법에 헌신한 것이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20세기에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진리를 배격한 채 교회 의식과 절기와 전통만을 강조하는 로마 카톨릭과 제도교회가 그것이며, 많은 근본주의자들도 예외일 수 없다. “자기 의”의 정결함 속에서 구원받으려 하는, 적어도 그 안에서 신앙생활을 안주하려고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12:7, 「마태복음 연구-11」 중 9:13 해석 참조).



12:22-24 『그 후에 눈 멀고 벙어리 된, 한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을 주께 데려오니 그를 고쳐 주시니라. 그러므로 그 눈 멀고 벙어리 된 사람이 말도 하고 보기도 하니 무리들이 다 놀라서 말하기를 “이 분이 다윗의 아들이 아니냐?”고 하더라.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마귀들의 왕인 비엘세불을 힘입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쫓아낼 수 없느니라.”고 하더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 앞에서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나타난다. 무리들은 그가 다윗의 아들임을 인정하는 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가장 심한 모독을 퍼붓는다.

“다윗의 아들”(the son of David)이라는 말의 중요성은 마태복음 1:1에서 잘 나타나있다(「마태복음 연구-1」 참조).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라는 호칭이 그 분의 신성(神性)을 말해주는 반면, “인자”(the Son of Man)와 “다윗의 아들”(the Son of David)이라는 호칭은 그 분의 인성과 심판주로서의 모습을 알려주는데, 그 중에서도 “다윗의 아들”은 다윗의 보좌에 대한 정통성(삼하7:12-16)을 가지고 팔레스타인을 치리하시는 유대인의 왕, 즉 메시야로서의 모습을 강조하는 말이다. [변개된 성경에서는 “the Son of Man”이 종종 “a son of man”으로 바뀐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격하시켜 에수님을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취급하려는 성경변개자들의 의도를 보여주는 변개이다.]

이러한 점에서 무리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당시의 일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민족의 메시야로(이방인들의 구세주가 아니라) 자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태복음 7:28-29에서 청중들이 그를 “권위있는 이”로 인지한 후로 예수님께선 백성들과 이방인에게 “주”(Lord), “다윗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계속 들어 오셨다(8:2,6; 9:27). 그들은 바리새인들보다 나았다.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이 사람이 마귀들의 왕인 비엘세불을 힘입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쫓아낼 수 없느니라.”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이들의 죄는 31,32절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불리워진다.



12: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각종 죄와 모독은 사람들에게 용서가 되나 성령을 거스르는 모독은 사람들에게 용서될 수 없느니라. 또 누구든지 인자를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있어도 누구든지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없느니라. 이는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니라.』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계속해서 꾸짖으시면서 “성령을 거스르는 죄”(THE SIN of Holy Ghost)와 “용서받을 수 없는 죄”(THE unpadonable sin)를 언급하신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동일시되는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지어 용서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는 은사주의자들에게서 이러한 예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예를들어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 방언하는 사람을 보고 “당신이 하는 방언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악령의 역사요.”라고 말한다면 그 은사주의자는 “당신은 성령의 역사를 모독하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요.”라고 하는 것이다. 또 어떤 믿음이 연약한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부흥되어지고 사역이 확산되어가는 것을 보고 자기의 육신적인 판단으로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고 비방할 때 그것을 성령을 거스르는 죄로 여긴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함부로 판단하여 성령님께 대하여 죄를 짓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물론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잘못 판단하여 비방할 때와 성령이 지시하시는 것을 가로 막아 성령님께 대하여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는 자백하여 성령충만을 구하여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경험을 종종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된다면 우리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 때문에 구원을 잃어버리는가? 그렇지 않다. 한번 구원받은 성도는 그 신앙의 성숙여하에 관계없이 구원받는다.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특수한 경우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는 모독”이고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마가복음 3:29-30에서 『성령을 거슬러 모독하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정죄의 위험에 처하리라.”고 하시더라.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들이 말하기를 “그가 더러운 영을 지녔다.”고 함이더라.』고 되어 있어 그 모독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러운 영을 소유했다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이적들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악령이라고 모독한 것이다. 더우기 그 이적들은 왕의 표적으로서 행하신 것인데, 그들의 말대로 악령의 역사로 이적들이 행해졌다면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더러운 영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

그러나 지금 이 세대에는 어느 누구도 이러한 죄를 지을 기회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우리 앞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 죄는 육체를 입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해서 하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모독을 받으신 것이 그 분의 왕의 사역, 즉 왕의 표적을 행하는 사역 가운데 있었던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 왕의 사역으로서 이적을 행하시는 그 분의 영을 악령이라고 말한 이 죄는 구체적으로 바리새인들에게 적용된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의식법에 고착되어 있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을 아무리 보아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그를 모독하였고, 이 죄를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정죄가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것인데도 이 시대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12:38-40 『그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몇 사람이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적을 보기 원하나이다.”라고 하더라.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찾으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줄 표적이 없도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고래 뱃속에 있었듯이 인자도 그처럼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의 심장 속에 있을 것이라.』



이스라엘 백성은 표적으로 시작한 민족이었고(출 4장),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었기에(고전1:22) 그들이 표적을 구하는 것 자체는 잘못된 일이 아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이 부분에서 특별히 그 죄를 꾸짖고 계신다. 왜냐하면 표적을 구한 사람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즉 어떠한 표적을 행하더라도 동요되지 않겠다고 마음에 작정하고 예수님을 흠잡기 위해서 표적을 요구하는 천국의 폭력적 찬탈자들(마11:12)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34절에서 “독사들의 세대”라고 불려지고 39절에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불려진다. 그들은 30절에서처럼 예수님과 함께 모으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흩뜨리는 자들이다. 예수님께는 이들에게 더 이상 보여줄 표적이 없다. 단지 자신의 죽음과 부활만을 증거로 보여주실 뿐이다.

요나의 표적에 대해서는 몇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먼저 자유주의자들은 요나의 사건을 실화로 믿지 않는다. 요나서의 기록이 나름대로의 “영적 의미”만을 준다고 믿는 그들에게 요나의 사건은 우화이고 비유이고 전설이며 설화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요나를 사실로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도 이 구절에서 사실로서 인정하셨다. 우리는 성경이 “고래가 요나를 삼켰다.”고 증거하므로 그대로 믿는 것뿐이다. 만약 성경이 “요나가 고래를 삼켰다.”고 기록했으면 우리는 요나가 고래를 삼켰다고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절대무오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고래”의 문제이다. 요나서에는 이 동물이 “큰 물고기”라고 기록되어 있고 킹 제임스 성경의 마태복음에는 “고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의 “과학적 상식”으로 볼 때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라 포유류이므로 고래라고 되어 있는 킹 제임스 성경이 틀렸다고 하여, 변개된 성경들은 마태복음의 이 구절에도 “큰 물고기”로 바꾸었다. 이에 맞추어 헬라어 학자들은 그들의 헬라어 사전에다가 이 단어 “케토스”(κήτος)의 뜻을 “큰 물고기”(huge fish)라고 해석해 놓아, 마치 킹 제임스 성경의 번역이 틀리고 다른 성경들이 맞다고 느끼도록 근거를 마련해 놓았다. 그러나 헬라어 “케토스”에는 분명히 “고래”라는 뜻이 있고 킹 제임스 성경은 그것을 찾아서 올바르게 기록한 것이다. 이것이 의심스러우면 창세기 1:21을 보라.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물들에서 풍성하게 나온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고래는 창조 제 6일에 땅의 짐승들(포유류)과 함께 창조되지 않았다. 고래는 창조 제 5일에 물고기들과 함께 창조되었다. 성경적으로 고래가 물고기와 함께 분류되지 않고 포유류와 함께 분류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포유류와 어류의 구분은 용어를 어렵게 만들어 진리를 감추려고 하는 현대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의 분류와 같이, 단지 과학자들의 분류일 뿐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과학을 가리켜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이라고 말한 것이다. 요나서에 나온 “큰 물고기”는 “고래”였다.

세번째는 지하 세계와 부활에 관한 문제이다. 마태복음에서 요나는 고래 뱃속에 있었다고 묘사되는데, 이것을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요나는 고래 뱃속에서 죽었음이 틀림없다. 사실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삼일을 살아 있었다고 하니 못믿는 것이지 그 속에서 죽었다고 하면 못믿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요나서 2:2에서는 『내가 지옥의 뱃속으로부터 부르짖었더니...』라고 말하고 있다.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지옥이라는 말도 없애고 “스올”이라고 음역해 놓음으로써 지옥의 실체를 가리워버렸는데, 요나는 분명히 죽었었고, 예수님도 그와 같이 땅의 심장 속에 들어가셨다. (히브리어에는 “스올”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단어의 뜻은 “지옥”인데 성경 변개자들은 지옥의 실체를 교묘히 가리고자 이 말을 번역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히브리어 그대로 음역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요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은(이것은 실제적인 죽음과 부활 사건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알리는 하나의 “표적”이 된 것이다.



12:41-4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파로 회개하였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위대한 이가 여기 있느니라. 심판 때에 남방의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하리니, 이는 그 여인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라.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이가 여기 있느니라.』



“심판 때”, “심판 날”은 항상 백보좌 심판을 가리킨다. 이것은 이 시대에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자기들의 행위로 심판을 받는 최후의 심판이다. “이 악한 세대”는 자기들 앞에 임하신 왕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니느웨 사람과 남방 여왕보다 더 큰 심판을 받는다. (「마태복음 연구-13」 중 11:20-24의 설명 참조)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그 사람이 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주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에게로 관심을 돌리시는 부분이다(「마태복음 연구-13」 중 11:28-30의 설명 참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선 요한복음 6:29에는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니, 즉 그 분이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라.』고 하셨고, 6:40에는 『또 이것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니,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라. 그리고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다. 즉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은 이로써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고, 우리는 믿음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천국을 가져오셨으나 “이 악한 세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에서도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로 관심을 돌리셨다. 그리고 그 구원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 개같은 이방인인 우리에게 옮겨졌고, 이제 우리는 그 올리브 나무의 가지에 접붙임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매우 감사할 일이지만 이제 이 구원의 때는 얼마 남지 않았고 이 구원은 다시 이스라엘 민족에게로 넘어가서 “천국”이 임하게 된다.

이제 다음 장에서는 그 “천국”이 이스라엘에게서 어떻게 감추어지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예언되고 전파된 천국은 이스라엘의 거부로 말미암아 감추어진다. 이제 그 “천국의 신비”를 다음 장에서 보게 될 것이다. BB
출처 :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2월  (통권 35 호)   page :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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