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과 아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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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았더니 그녀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말하기를 “내가 주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하니라. 그녀가 또 카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였으나 카인은 땅을 경작하는 자였더라.



본문을 보면 기록된 사건들이 연대기순으로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카인과 관련해서 뭔가 잘못된 것이 있음에 틀림없다. 본문에 따르면 아담은 그의 아내와 관계를 가졌고 그녀는 처음으로 임신해서 처음으로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이 구절 주위에는 어떤 어둡고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첫째, 이브는 그녀의 첫 아들이 창세기 3:15 약속의 성취인 것으로 착각했다. 그러나 카인은 전혀 “여자의 씨”가 아니었다. 둘째, 카인은 “악한 자로부터 나온 자”(요일 3:12)이며 그의 생애와 성품의 모든 요소가 마지막 때의 “죄의 사람”(살 후 2장), 즉 “짐승”(계 13장)과 일치하고 있다.

1. 카인과 적그리스도는 둘 다 뱀의 “씨”이다(“멸망의아들”, 살후2장)

2. 카인과 적그리스도는 둘 다 표를 갖고 있어서 그들을 식별해 낼 수 있다(계13:13-18)

3. 카인과 적그리스도는 둘 다 살인자이며 거짓말쟁이이다(요8:44).

4. 카인과 적그리스도는 둘 다 저주를 받았다(시119:21).- 더 자세한 비교는 <짐승의 표, Mark of the Beast>를 볼 것.)



우리는 창세기 4:1의 “임신”이 이중임신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쌍둥이가 한 달 간격을 두고서 임신될 수 있다는 것은 의학계의 정설이다). 만약 그렇다면 카인과 아벨은 쌍둥이인 셈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카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라고만 말하셨지 그녀가 카인을 낳은 후 다시 임신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음을 주목하라.

카인과 아벨은 성령께서 선과 악 사이의 차이점을 분명히 보여주시기 위해 두 가지 요소를 대조시킨 여러 가지 예들 중 하나이다. “차별”은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세워 주시기 위해 여러 쌍을 대조시킴으로써 무엇과 무엇을 “차별”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이시는 것이다(이스마엘 對 이삭, 카인 對 아벨, 에서 對 야곱, 베드로 對 바울, 사울 對 다윗, 아론 對 모세 등). 때로 이러한 쌍 중에는 도덕적, 영적인 차이가 거의 없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엘리야와 엘리사, 유다와 요셉, 야펫과 셈 등의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도 각 사람의 특징들은 그 사람과 짝을 이루는 사람의 성격과 대조시켜 볼 때 더욱 뚜렷해진다. 이와 같은 대조적인 “짝짓기”는 창세기 2-3장에서 보편적인 법칙으로 수립된다. 인간은 짝을 이루었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일을 수행한다.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쌍”의 경우(에서와 야곱)에서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진노로 주를 찬양하게 하시며(시76:10), “막대기”는 “지팡이” 만큼이나 양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다(욥9:34, 사10:5).



“카인”이라는 어휘는 히브리어 어근을 추적해 보면 “창”, “획득”, “애가, 탄식” 그리고 “쇠를 벼리다”는 말들과 연관이 있다. 히브리어는 두 가지 면에서 독특하다.

기술적으로 볼 때 히브리어의 동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제”를 갖고 있지 않다. 이는 영원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없기 때문이다(이사야 53장을 보면 미래적 사건을 다루면서 시제는 과거시제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어의 어근은 그것이 동사, 형용사, 명사, 전치사, 그리고 부사로 전개되면서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의미들을 연관시켜 보면 겉보기에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 같은 구절들이 서로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욥기 41장의 “리비야단”은 “꼬부라지고 날쌘 뱀”(사27:1)이며, 용일 뿐만 아니라(계12장) 히브리어 어근을 추적하여 보면 “꼬여진”, “감겨진”, “연기”, “달라붙다”, “빌다”, “바람 불다”, “쉿소리를 내다”, “속삭이다”, “마술이나 요술을 행하다”, “구리”, “놋”, “빛나다”, “놋 끈” 등과 관련되어 있다. 더 자세한 분석을 할 필요도 없이 이미 열거된 단어들만 보더라도 민수기 21장의 “놋 뱀”은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자리를 취하시는 것이며, 이브는 창세기 3:1-6에서 뱀에게 최면을 당했었고(그는 마술사였으므로), 사기꾼들은 대상을 물색할 때 그의 목소리를 낮춘다(속삭인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카인은 “철로 된 창”이다. 이 철창은 골리앗이 가지고 다녔고(삼상17: 7), “철”(iron)은 늘 액운을 몰고 다니기 때문에 성경독자라면 이 사실을 모를 수가 없다(삼상23:7, 신3:11; 4:20, 창4:22, 민35:16, 렘15:12, 단2:33 -43). 이처럼 성경을 하나하나 찾아 확인해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데도 오늘날의 보수주의자나 근본주의자들은 이 작업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있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마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위대한 일들”과 기념비적인 사업을 수행하느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장엄하며 권위 있는가에 대한 영광스러운 감각을 상실해 버렸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일”을 추진하기 위한 도구로서 간주하고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여”,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시119: 40도 볼 것).

성경에는 쓸데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카인은 “철창”이다. 그리고 이 첫번째 언급은 향후 성경해석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철창을 지닌 자가 골리앗이 되었건 우리의 구세주의 옆구리를 찔렀던 로마 군인이 되었건 간에 하나님께서는 시작부터 선악이라는 이원론적 절대가치를 수립해 놓으신 것이다. “철창”은 그 어떤 경우도 선과는 관계가 없다. 철창은 진화해서 오늘날에는 220mm 총탄이 되기도 했고 또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철 대신 은이나 납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철창”이 무엇에 쓰이는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이것을 변형시켜 미사일이나



로켓트로 사용하건, 루르지방의 대장장이가 두드리는 망치를 언급하건, “마술과 마귀론 백과사전”에서 사탄의 생식능력이라고 설명하건 간에, 철은 <킹제임스성경>에 정의내려진 그대로, 그 의미는 그대로 남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틀을 세우시고 이에 입각해서 모든 모형(예표)들과 기준들을 설정하시며 인생사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이것들을 통하여 판단하신다. 구약 성경에서는 늘 부정적인 내용을 갖고 있는 진리들(negative truths)이 긍정적인 내용의 진리들(positive truths)보다 앞서 언급된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입증되어 있다.

1. 철창인 카인이 선한 목자인 아벨보다 먼저 나온다.

2. 털로 덮힌 “붉은”, 에서가 “이스라엘의 통치자” 야곱보다 먼저 나온다.

3. 땅에 속한 노예 이스마엘이 “선택받은 씨” 이삭을 앞서 있다.

4. 불안정한 루우벤이 “지파들의 사자”격인 유다 보다 앞서 나온다.



그런데도 현대의 주석가들은 신약성경에서는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이 전부 제거되었다는 이상한 이론을 들고 나온다. 이들의 주장은 은혜와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에게 왔기 때문에(요1:17)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철저히 진화론적 사고에 젖어 있는 사람일 뿐이다. 이들은 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말씀들을 무시해 버린다(마23장, 롬8장, 행20장, 벧후2장, 유, 계13, 20장 등). 이들은 “선한 행위를 하는 자들”과 함께 등장해서 사탕발림 같은 성경구절들만 들고 나온다. 그러나 부정 없는 긍정은 없다. 선불교에 대한 스즈끼의 가르침이나 니르바나, 사마디 등과 같은 동양의 가르침이 아무리 그런 주장을 펼지라도 그것은 그렇지 않다. 이들 구루(Guru)나 불자들의 육체 역시 부정과 긍정이라는 법칙 하에 움직이고 있으며 (-)극이 없는 밧데리는 죽은 밧데리인 것이다. 이 우주에 있는 가장 작은 전자 하나에도 양극과 음극이 있으며 이 근본적이고, 기본적이며,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절대 개념을 무시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왜곡된 철학과, 비생산적인 종교, 거짓 가치, 그리고 비과학적 학문에 내던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인은 분명히 잘못된 사람의 완벽한 예표로서 제시되어 있다. 반면 그의 짝인 아벨은 올바른 사람의 예표로서 제시되어 있다.

아벨은 “양치는 자”였다. 성경의 첫번째 언급의 원칙에 입각해 목자(양치는 자)에 관한 관련 구절들을 추적해 보면 “우상목자”(슼11:16,17)와 그의 “친구”들(슼11:8, 계17:6-13)을 제외하고는 목자라는 단어는 항상 좋은 것과 연관되어 있다.



아벨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헤벨(Hebel)은 “지키는 자” 혹은 “먹이는 자”와 관련되어 있으며 어근을 추적해 보면 “일시적인”, “지나가는”, “안개”, “수증기”, “숨쉬기” 등과 연관이 있다. 따라서 아벨의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였다(약4:14). 아벨은 또한 아버지의 양떼를 지키는 자였으며(겔 34장), 양을 먹이는 자였다(요10:1-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가복음 11:51과 마태복음 23:35에서 아벨이 역사의 실존 인물이었음을 확실히 하셨다. 만약 바르트와 브루너가 옳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영성 고양의 목적”을 위해 “우화”를 실제 역사처럼 적용하셨을 뿐이라고 믿어야만 할 것이다(바르트와 브루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어쩌면 그렇게도 바르트와 브루너와 똑같이 생각하실 수 있을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카인은 땅을 경작하는 자였더라.” 사태는 처음부터 잘못되어 가고 있다. 왜냐하면 카인은 저주받은 땅을 경작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주 하나님께서는 5절에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이다. 반면 아벨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체를 돌보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4절에서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것이다. BB
출처 :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7월  (통권 40 호)   page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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